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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_study

[멘토공부] 모두가 그리워할 교황_프란치스코

by 해피니스잔Happiness_Susan 2025. 4. 25.

프랑치스코 교황

 

우리 모두 프란치스코 교황님에 대해 한 번쯤 들어봤을 거예요. 2013년에 교황님이 되신 후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계시죠. 특히, 교황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고 환경 보호에도 힘쓰시는 모습으로 유명하세요. 2025년 4월에 돌아가셨지만, 교황님이 우리에게 남긴 이야기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주고 있답니다.  

 

신기하게도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아주 오랜만에 유럽이 아닌 다른 대륙에서 오신 교황님이세요! 무려 8세기 이후 처음이라고 하니 정말 놀랍죠? 이는 전 세계적으로 가톨릭 교회가 얼마나 다양해졌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변화라고 할 수 있어요.  

 

교황님의 이름인 '프란치스코'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라는 분을 기리기 위해 지으신 건데요 , 이 성인은 아주 겸손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사셨다고 해요. 교황님의 이름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교황님 역시 겸손과 봉사를 중요하게 생각하신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아기에게 뽀뽀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어떤 분이셨을까요?

 

어린 시절 이야기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1936년 12월 17일에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도시에서 태어나셨어요. 아버지는 이탈리아에서 아르헨티나로 이민 온 회계사셨고, 어머니 역시 이탈리아 이민자의 딸이었대요. 다섯 형제 중 첫째로 태어나셔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평범한 동네에서 자라셨다고 해요. 아버지는 기차 회사에서 일하셨고, 어머니는 집에서 다섯 아이를 키우셨대요. 지금은 여동생 마리아 엘레나 한 분만 살아계신다고 하네요. 교황님 가족은 축구를 아주 좋아했고, 특히 '산 로렌소'라는 팀의 열렬한 팬이었다고 합니다.  

 

이탈리아에서 이민을 오신 가족 배경과, 당시 이탈리아의 정치적인 어려움 때문에 아르헨티나로 오게 된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어린 베르골리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원래 성함) 에게 사회의 불의에 대한 생각을 일찍부터 갖게 했을 수 있어요. 이는 훗날 교황님께서 이민자나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시는 데 영향을 주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죠.  

 

학교와 공부 이야기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공립학교를 다니셨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화학 기술 자격증을 따셨대요. 잠시 동안 식품 연구소나 식품 회사에서 화학 기술자로 일하기도 하셨고요. 신기하게도 예수회에 들어가기 전에는 나이트클럽에서 기도하는 일을 하거나, 청소부, 화학 실험실 보조 등으로 일하신 적도 있다고 해요. 칠레에서는 인문학을 공부하셨고 , 아르헨티나에서는 철학 석사 학위를 받으셨어요. 또, 고등학교에서 문학과 심리학을 가르치기도 하셨대요. 신학 공부도 꾸준히 하셔서 신학 학위도 받으셨고요. 스페인과 독일에서도 공부를 하셨지만, 아쉽게도 박사 논문은 끝내지 못하셨다고 합니다.  

 

사제가 되기 전에 다양한 직업을 경험하신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어려움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거예요. 훗날 교황님께서 사회 정의와 노동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것도 이런 경험 덕분일 수 있겠죠.  

 

 

 

신부님이 되기까지

 

예수회와의 만남

21살 때 심한 폐렴을 앓고 오른쪽 폐의 일부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으신 후, 1958년에 예수회에 들어가기로 결심하셨다고 해요. 1958년 3월 11일에 예수회 수련기에 들어가셨고 , 1960년 3월 12일에 첫 서원을 하셨습니다. 젊은 시절에 생명을 위협하는 병을 겪으신 경험은 교황님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고, 종교에 헌신하기로 결심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거예요.  

 

신부님, 그리고 주교님

1969년 12월 13일에 신부님이 되셨고 ,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지도하는 역할도 하셨어요. 1973년 4월 22일에는 예수회 종신 서원을 하셨습니다. 1973년부터 1979년까지는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예수회를 이끄는 책임자로 일하셨는데 , 이 시기는 아르헨티나의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했던 시기였어요. 1979년부터 1985년까지는 신학교 교장으로 일하면서 학생들에게 신학을 가르치셨고 , 코르도바에서는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상담해 주는 역할도 하셨다고 합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대주교님

1992년 5월 20일에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보좌 주교로 임명되셨고 , 1997년 6월 3일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공동 대주교가 되셨어요. 그리고 1998년 2월 28일에는 마침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대주교님이 되셨답니다. 대주교님으로서 교황님은 아주 겸손한 생활을 하셨다고 해요. 비싼 집 대신 작은 아파트에 사셨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가난한 사람들의 동네를 자주 방문하셨대요. 사람들은 교황님을 '호르헤 신부님'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가난한 지역에 교회를 짓고 신학생들을 보내 봉사하도록 하셨고 , 사회의 불의나 이주 노동자 문제, 낙태, 동성 결혼 등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어요. 2005년부터 2011년까지는 아르헨티나 주교회의 의장을 맡기도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교황님을 '빈민가의 주교님'이라고 불렀다고 하네요.  

 

추기경님의 자리까지

2001년 2월 21일에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에 의해 추기경으로 임명되셨어요. 추기경은 교황님을 뽑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분들이에요. 2005년에는 교황 베네딕토 16세를 뽑는 회의에 참여하기도 하셨고 , 당시 유력한 교황 후보 중 한 분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드디어 교황님으로!

2013년 3월 13일, 드디어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교황으로 뽑히셨어요!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쓰신 첫 번째 교황님이시죠. 교황님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이 이름을 선택하셨다고 해요. 교황님의 좌우명은 'Miserando atque eligendo'인데, 이는 '불쌍히 여기시어 택하시다'라는 뜻으로, 17살 때 하느님의 자비를 느꼈던 경험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2013년 3월 19일에는 교황으로서의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하셨어요. 교회의 운영과 개혁에 대해 조언을 구하기 위해 전 세계의 추기경 8명으로 이루어진 자문단을 만들기도 하셨고 , 교황궁 대신 바티칸의 한 호텔에서 검소하게 생활하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삶은 겸손과 봉사,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따뜻한 마음으로 가득 찬 이야기인 것 같아요.
 
교황님은 비록 지난 2025년 4월 21일로 영원한 안식 가지시게 되었지만 
그의 행보는 우리 마음속에 영원히 남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