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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대로_essay

우리 아빠 아직도 왕이고 싶은 거야? (경상도 딸의 깨달음과 고백)

by 해피니스잔Happiness_Susan 2025.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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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우리 집에는 작은 왕국이 존재했는지도 모른다. 왕은 단연 나의 아버지. 주말 아침, 리모컨은 그의 손에서 굳건히 성을 지켰고, 밥상머리에서는 어김없이 시사 뉴스의 웅장한 사운드가 울려 퍼졌다. 용돈이라도 건네려 하면 "됐데이!" 호통이 날아왔지만, 그 뒷모습에는 어딘가 모를 서운함이 배어 있었다.

 

돌이켜보면, 내 주변의 아버지들도 비슷한 왕국을 하나씩 건설하고 다스리고 있었던 것 같다. 특히 '경상도 아버지'라는 단어에는 왠지 모를 묵직함과 고집스러움이 덧입혀진 느낌이다. 무뚝뚝함 속에 숨겨진 깊은 사랑, 그리고 쉽게 꺾이지 않는 자존심은 때때로 딸과의 거리를 만들기도 했다.

 

어릴 적, 아버지의 그런 모습은 그저 당연한 풍경이었다. '아빠는 원래 저런 사람'이라고 무심히 넘겼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나 스스로의 세계를 구축하면서, 아버지의 왕국은 낯설고도 이해하기 어려운 풍경으로 다가왔다. 왜 아버지는 아직도 왕처럼 대접받기를 바라시는 걸까? 그 해답을 찾아, 과학과 역사의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려본다.

 

어쩌면 아버지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이어져 온 남성의 역할에 대한 무의식적인 믿음이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맹수로부터 가족을 보호하고,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냥에 나섰던 먼 조상들의 DNA가 아버지에게도 흐르고 있는 것일까. 특히 남아선호 사상이 강했던 과거 사회의 문화적 학습은, 아버지에게 '남성은 존경받아야 한다'는 굳건한 신념을 심어주었을지도 모른다.

 

 

뇌 과학의 관점에서 보면, 권위는 일종의 '쾌감'과 연결되어 있을 수 있다. 오랫동안 가족의 가장으로서 권위를 누려온 아버지의 뇌는 이미 그 보상 시스템에 익숙해졌을 것이다. 이제 자식이 성장하여 아버지의 영향력이 줄어들 때, 뇌는 과거의 만족감을 그리워하며 무의식적으로 그 권위를 재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와 아버지는 너무나 다른 시대를 살아왔다. 아버지의 젊은 시절은 권위주의적인 사회였고, 개인의 의견보다는 집단의 질서가 우선시되었다. 반면, 나는 수평적인 관계와 자유로운 소통이 더 익숙하다. 아버지의 익숙한 방식은 때때로 딸에게 권위적으로 느껴지고, 아버지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은 '꼰대'라는 단어로 치부되기도 한다. 어쩌면 아버지도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딸과의 관계 속에서 나름의 혼란을 느끼고 계신지도 모른다.

 

역사의 페이지를 넘겨보면, 아버지의 왕국을 이해하는 또 다른 열쇠를 발견할 수 있다. 수백 년 동안 우리 사회를 지배했던 유교 문화는 아버지에게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했다. '아버지는 하늘과 같다'는 가르침은 아버지의 권위를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었고, 이는 아버지 세대의 무의식 속에 깊숙이 뿌리내렸을 것이다.

 

 

특히 경상도라는 지역적 특성은 아버지의 왕국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체면과 가문의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화 속에서, 아버지들은 더욱 강한 책임감과 자존심을 가져야 했을 것이다. 때로는 딸에게 섭섭함으로 다가오는 아버지의 뚝뚝함 속에는, 그만의 방식으로 가족을 지키려는 굳건한 의지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고난과 역경의 산업화 시대를 헤쳐 온 아버지 세대는, 묵묵히 땀 흘려 가족을 부양하며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왔다.

어쩌면 아버지의 '왕' 심리 속에는, 그 힘든 시간을 보상받고 싶어 하는 마음, 이제라도 가족들에게 인정받고 존경받고 싶은 간절한 바람이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아버지의 왕국은 조금씩 변화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딸은 더 이상 아버지의 그림자 속에 머무는 어린 존재가 아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생각을 존중하며, 때로는 친구처럼 편안하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동등한 존재가 되고 싶다. 아버지의 경험과 연륜은 존경하지만, 이제는 딸의 이야기도 귀 기울여 들어주시길 바란다.

 

아버지, 당신의 굳건함 뒤에 숨겨진 외로움과 따뜻한 마음을 이제는 안다. 딸로서, 당신의 삶의 무게를 감히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이제는 '왕'으로서의 권위보다는 '인생의 선배'로서, 때로는 푸근한 '아버지'로서 딸에게 힘이 되어주시길 바란다. 아버지의 깊은 사랑을 믿기에, 이제는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며, 더욱 따뜻하고 행복한 가족이라는 이름의 공동체를 함께 만들어가고 싶다. 아버지의 왕국에도, 이제는 부드러운 대화와 따뜻한 공감이 흐르는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기를 조심스럽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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